철권과 소년 만화에서 읽히는 일본 특유의 혈통 서사
일본의 격투 게임이나 소년 만화를 보다 보면 유독 반복되는 설정이 있다. 바로 가문의 이름, 그리고 그 피에 내재된 무언가에 집착하는 서사 구조다. 처음에는 개인의 노력과 성장을 다루는 듯 보이지만, 이야기가 정점에 다다를수록 결국은 '어떤 핏줄인가'의 문제로 귀결되곤 한다.
가문과 숙명에 갇힌 격투 게임의 세계관
일본 격투 게임의 양대 산맥인 철권과 킹 오브 파이터즈(KOF)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숙명이다. 철권의 미시마 가문은 데빌 인자라는 혈통적 저주를 대물림하며 대대로 서로를 파괴하려 든다. KOF 역시 쿠사나기와 야가미라는 가문이 짊어진 수백 년 전의 약속과 피의 저주가 서사의 중심축을 이룬다.
이 세계관에서 캐릭터의 강함은 후천적 수련보다 선천적인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라이벌들까지도 결국은 전설적인 문파의 후계자이거나 특별한 피를 이어받았다는 설정이 붙으며, 그들의 싸움은 개인의 갈등을 넘어 가문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된다.
'원나'로 대표되는 소년 만화의 혈통주의
이러한 경향은 소위 '원나블'이라 불리는 일본 소년 만화에서 정점에 달한다. 나루토는 초기에 낙제생의 고군분투를 그렸으나, 결국 주인공은 4대 호카게의 아들이자 신의 아들인 아수라의 환생임이 밝혀졌다. 원피스의 루피 역시 단순한 고무 인간이 아니라 태양의 신 '니카'의 열매를 먹은 선택받은 존재이자, 전설적인 해군 거프와 혁명군 드래곤의 혈통임이 강조된다.
주인공을 보좌하는 부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나루토의 라이벌인 우치하 사스케는 일족 특유의 동술을 타고난 우치하 가문의 후예이며, 원피스의 롤로노아 조로와 상디 또한 각각 전설적인 검술 가문(시모츠키 가)과 유전자가 개조된 왕족(빈스모크 가)의 핏줄임이 드러났다. 이들에게 강함이란 단순히 수련의 결과물이 아니라, 가문에 내재된 잠재력이 발현되는 과정에 가깝다. 일본 창작물에서 혈통은 캐릭터에게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서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치트키와 같다.
한국, 서양과는 또 다른 일본만의 이질감
한국의 독자들이 일본 창작물을 접할 때 느끼는 묘한 이질감은 여기서 기인한다. 동양적인 정서를 공유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가 중시하는 '개천에서 용 나는' 식의 자수성가형 서사나 개인의 의지로 시스템을 바꾸는 서사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서양의 영웅들이 개인의 신념이나 우연한 사고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한다면, 일본은 가업과 계보를 중시하는 그들만의 문화적 배경 때문인지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완성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복수조차 개인의 감정이 아닌 가문의 업보를 청산하는 과정으로 그려지곤 한다.
결국 일본식 판타지는 "내가 누구인가"보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유교적 질서와도 다르고 서양의 개인주의와도 다른, 일본 특유의 폐쇄적이고 숙명론적인 세계관이다. 주인공의 주먹 뒤에 가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이 독특한 서사 구조는, 어쩌면 개인보다 계보를 우선시하는 일본 사회의 오래된 투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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